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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집, 집, 집... (1편)volume.47 2024. 6. 1. 00:11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을 집이라고 한다. 그러니 고대로부터 건축을 다룰 때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단어도 은신처나 피난처를 의미하는 집(shelter)이다. 오늘날의 복잡하고 다양한 기능의 현대 건축물들은 집을 기본으로 하여 발전해 왔다. 다시 건축의 처음 시작점으로 돌아가 건축공간의 모태와 같은 ‘집’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방문했던 장소의 집들을 스케치와 함께 이야기를 해보자.
공동주택 아파트
현대의 집을 이야기 할 때 아파트를 빼놓을 수 없다. 요즘 시대를 일컬어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할 만큼 지방도시 어디를 가도 몰개성한 아파트로 이루어진 획일적인 풍경이 먼저 다가온다. 소도시의 개성도 특색도 아파트라는 거대 공룡같은 공동주거에 의해 점령당했고 초식동물같은 힘없는 단독주택들은 점점 함몰되고 있다. 현대인들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불편한 삶 대신 극단적으로 안락한 삶과 편리로 포장된 주거생활을 선택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러한 이유로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정형화된 공간에서 획일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가끔씩 반문한다. 건축가들은 대개 자신이 디자인한 주거공간에서 살 것 같지만 내 주변의 많은 건축가들 역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파트 거주는 전형적인 도시형 라이프라서 자연으로부터 연유된 건강한 삶의 패러다임과 공존하기는 매우 어렵다. 여러 세대가 함께 사용하는 공동 주거는 대개 건조하고 천편일률적인 거주 공간이라서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공간 활용이 어렵다. 하지만 그나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한적한 경기지역이고 넓은 단지에 조경시설이 잘 조성된 편이어서 위안을 삼는다. 주변을 산책하면서 감성적인 아파트 풍경을 드로잉북에 기록하곤 한다.
일산 식사동
내가 거주하고 있는 고양시 일산의 식사동 아파트 인근은 다행스럽게도 아직 전원의 풍경이 남아있다. 가까운 곳에 논과 밭, 비닐하우스와 시골집들이 있어 주말에는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는 일이 루틴이 되었다. 겨울을 보내고 모처럼 날씨가 화창한 휴일이라서인지 지인 한 분이 골프장에 나왔다고 녹색의 잔디 위에서 멋진 포즈로 찍은 사진을 보내 주셨다. 때마침 나는 아파트 인근의 시골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는 중이었다. 사진 속 골프장의 초록 잔디와 내가 걷고 있는 황토 흙길이 선명하게 대비가 되는 순간이었다. 인공으로 조성된 세련된 녹지 환경과 자연 그대로의 풋풋한 생태환경의 비교랄까?
걸을 때마다 폭신하게 발에 밟히는 초봄의 흙은 느낌이 참 좋기도 하거니와 진한 흙 내음도 맡을 수 있으니 골프장이 부럽지 않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낯선 이방인의 출현으로 놀랐는지 동네 개들이 한꺼번에 짖어대서 잠깐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 동네는 자연과 함께 일구어 온 텃밭과 쓰러질 듯한 오랜 농가들이 모여 시골 풍경을 이루고 어릴 적 고향에서 본 듯한 장면이라서 정겹고 친근하다. 한적한 농가 옆 비닐하우스 안에는 연초록의 채소들이 자라나고 있다. 돌아오는 길 가에 놓인 녹이 슨 컨테이너 박스마저도 하나의 오브제처럼 시골 마을의 빈티지한 풍경 안에 녹아든다.
용문집
지인들 중에는 도심에 아파트 거주를 하면서도 산 좋고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 동네에 별장을 소유한 분들이 계시다. 가끔 초대받아 놀러 가는 입장에서 감사하지만 손님을 접대하는 수고가 동반되니 집주인께 송구하기도 하다. 평소에도 주말마다 잔디를 다듬고 정원을 가꾸고 물새는 선홈통을 직접 고쳐야 하는 등, 주인의 부지런함은 집의 유지관리 기준이 된다.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깊은 밤, 하늘에서 별이 선명하게 쏟아져 내리는 장면을 목도할 수 있는 집이라면 수고가 헛되지 않으리라. 이런 집들은 대개 ‘세컨하우스’답게 거실 한 켠에는 벽난로가 있는데 한겨울에 눈이 내리는 날, 장작불 앞에서 재즈 음악과 함께 와인 한 잔이 딱 어울리는 감성적인 공간이 있으니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별장은 유지관리에 많은 비용과 정성이 들어가야 함으로 별장을 직접 소유하기보다 별장이 있는 친한 친구를 사귀는 게 낫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옥천
양평 못미쳐 옥천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냉면으로 유명한 곳이라 냉면의 덕후들은 서울에서 차를 몰고 이 곳까지 와서 냉면을 즐기고 갈 정도다. 마을 중간에 빈티지한 집이 눈에 들어와 스케치북에 담고 싶어졌다. 주변에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와 기울어진 담벼락, 전봇대와 간판, 잡초가 자라나는 기와지붕, 빛바랜 툇마루, 녹이 슨 선홈통과 굴뚝 등, 일반인들에게는 지저분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나의 시선과 발길을 붙잡는다. 소외된 아름다움들이 모여 레트로 감성으로 어우러져 있다.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오늘까지 왔으니 내 눈에는 참 대견하고 예쁘다. 인위적으로는 절대 만들기 어려운 멋스러움이다. 냉면을 먹고 오랜만에 길 위에서 얻은 큰 수확이다. 저 집이 아직 남아있을까 궁금하다.
문호리
경기도 남양주의 문호리는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배경이 된 마을로 유명하다. 겨울날, 햇볕이 잘 드는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창밖으로 바라본 풍경은 농가와 상가 건물들이 높낮이를 달리하며 중첩된 산들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배열되어 있다. 아직은 겨울이라 산등성이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있다. 시린 겨울이 지났으니 새 희망으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 동네, 북한강변으로 나가면 가끔 리버마켓이 열리기도 하는데 이런 날은 교통체증이 심하니 주의하시라.
아산 외암리마을
아산 외암리에는 전통 기와집과 초가집으로 구성된 마을이 있다. 계절이 바뀔 무렵,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는데 현대도시와는 완전히 주파수가 다른 영역을 찾는다면 주저 없이 이곳을 추천하고 싶다. 옛 고택들의 정취를 고스란히 느끼며 정지된 시간 속을 유영하듯 한가롭게 산책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 전통마을은 주민들이 실제로 생활을 하고있는 곳이라서 오랜 세월 속에 삶을 영위해 온 주민들의 풍속도가 민속촌처럼 박제되지 않아 좋다. 높지 않은 돌 담장ㅇ을 길동무 삼아 나란히 걷다 보면 눈부신 햇살에 눈 부신 곳이다. 산수유 피어나는 초봄도 좋지만 늦가을에는 구름 없는 파란 하늘에 수놓듯 걸려있는 주홍색의 감나무 열매의 풍겨이 완벽하여 가을의 정취가 진하게 전달되는 곳이다.
답사 뒤풀이로 마을 어귀 앞 식당에서 피로도 풀 겸, 주저않아 주문한 도토리묵 무침과 달짝지근한 밤막걸리가 역시 일품이다. 동행한 일행들과 함께 정겨운 대화로 밤이 무르익어 간다.
(2편에서 계속 ...)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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