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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캐나다 밴쿠버volume.49 2024. 8. 2. 12:57
내게 첫 해외 여행지는 밴쿠버였다. 1991년에 세계건축가대회(UIA)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렸고 이 행사에 한국건축가협회(당시 윤도근 회장)에서 방문단을 구성하여 행사 참여 뿐 아니라 캐나다와 미국의 주요 도시를 견학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건축가들 틈에 어쩌다가 제일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는 내가 회사에서 선발된 점도 행운이었다. 그러니 첫 방문 도시인 밴쿠버에서 느껴지는 이국의 도시풍경은 처음 해외를 방문한 신진 건축가의 눈에 너무도 신기방기했다.
그때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방문해 보니 너무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밴쿠버 공항은 처음처럼 낯설다. 이번에는 가족들과 함께라서 공항에 내리자마자 인근 랜트카 업체를 찾아 곧바로 승용차를 빌렸다. 목적지를 구체적으로 계획하지 않았으니 시내의 이곳저곳을 상황에 맞게 랜덤으로 다녀보아야겠다. 우선 내비게이션을 검색하고 밴쿠버 시내를 돌아보다가 관광객들에게 유명하다는 스탠리파크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요트가 가지런히 정박된 항구 저편에 고층빌딩이 즐비한 밴쿠버 특유의 익숙한 풍경이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넉넉한 부지에 조성된 공원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많아 그 그늘 아래로 반려견과 산책하는 시민들의 발걸음은 넉넉하다. 역시 친환경적인 도시는 쾌적하고 매력적이다. 나 역시 바쁜 일정을 뒤로하고 현지 주민들처럼 녹음이 우거진 공간에서 여유와 쉼을 얻어갈 수 있는 기회다.
UBC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근처 고대 인류학 박물관 'MOA (Museum of Anthroplogy)' 역시 두 번째 방문이다. 캐나다의 대표건축가 아서애릭슨의 오래된 작품으로 건축 조형 디자인이 독특하고 전시 공간은 섬세하다. 야외 전시물 중 토템을 표현하는 장대한 기둥 형식의 투박한 조형물(Totem Pole)들이 캐나다의 토착 원주민의 시절을 상상하게 하며 오랜 역사를 상상하게 한다.
인근 숲 속에서 급경사 계단을 발견하고 내려가니 숲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바다가 파도 소리부터 앞세우고 기다린다. 인적이 드문 해변인데 모래 대신 잘그락거리며 조약돌을 쓸어내리는 파도 소리가 선명하다. 이런 장소는 혼자서 앉아 사간을 잊고 멍 때리기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가 ‘Wreck beach’라고 유명한 선택적 누드 비치(Clothing is optional)였다. 난생처음 맞이한 누드 비치는 매우 당혹스럽다. 젊은 여성들은 찾아볼 수가 없고 나이가 드신 남성 몇 분만 완전 누드로 선탠 중이다. 나도 저들처럼 벗어야 할까를 잠시 고민했다.
밴쿠버에서 남쪽으로 약 50분 정도 이동하면 랭리라는 소도시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포트랭리’라는 조용하고 작은 마을이 있다. 프레이져 강이 흐르고 나무숲이 우거진 강가에는 선착장을 가진 오래된 박공집이 있어 조용하고 전원의 분위기로 고즈넉하다. 기찻길도 있고 그 옆 산책로 주변에는 오래된 나무와 벤치가 강변의 풍광을 더해준다. 주변의 자연과 동화되어 있자니 잠시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바다 조망이 뛰어난 유명한 '화이트록 비치'에 잠깐 들러 해변과 어우러진 주거지들과 도로를 따라 나열된 상점 앞을 관광객 모드로 어슬렁거리며 구경한다. 본젤라또를 주문하고 기차 선로를 따라 바다 조망이 좋은 공원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갈매기들의 느린 비행과 한가로운 요트들이 떠가는 바다는 이미 한 폭의 그림이다. 따사로운 오후 눈부신 햇볕 아래 선탠을 즐기러 나온 가족들의 느긋함을 보니 나 역시 한낮의 고양이처럼 나른해진다.
하루는 승용차를 몰고 과감하게 미국국경을 넘어서 시애틀로 가보려고 출발했다. 출입국 절차를 잘 몰라서 그냥 시도해 보았는데 별도로 입국신고소에 주차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라고 한다. 영어 소통도 어렵고 입국 절차는 생각보다 까다롭지만 이런 경험도 다 유익한 경험이자 공부라고 여긴다.
입국심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미국으로 진입, 시애틀로 가는 길에 서해 바다 쪽으로 '피달고'라는 섬이 있다. 시애틀 도시보다는 섬 풍경을 관광하기로 했고 내친김에 아나코디스 항만과 오크하버까지 답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디에서 본 듯한 현대건축물들이 밀집된 도시보다 자연풍경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길마다 만나는 바다며 호수에는 그림엽서처럼 예쁜 집과 요트 정박시설이 있고 한가로이 자연과 동화되어 사는 곳이 많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분주하게 사는가. 부럽기도 하고 시샘도 나지만 바쁜 일상에서 탈출하여 멋진 이국적 풍경을 잠시 체험하는 것으로라도 만족하고 감사할 일이다.
먼 나라의 여행이나 출장은 시차가 엉킨 이유로 어김없이 이른 새벽에 잠이 깬다. 미리 챙겨간 스케치북에 낮에 보았던 풍경들을 기록하는 익숙한 시간이다. 채색을 하기 위해 휴대용 팔레트를 열었는데 아뿔싸 그 안에 들어있어야 할 휴대용 붓이 없다. 서둘러서 짐을 싸느라 미처 꼼꼼히 챙기지 못한 실수다. 날이 밝는 대로 물어물어 화구를 취급하는 매장에 찾아가서 다행히 작은 붓 몇 개를 구입한 후 호텔 객실에서 작업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에서 지나가며 보이는 농가와 피달고 섬, 오크하버의 농가 창고, 화이트 록 비치의 인상적인 풍경들을 잊기 전에 기록하는 작업이다. 정신없이 몰입한 채로 몇 시간을 몰아쳐서 작업한 결과, 아뿔싸 어깨에 담이 결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림으로 얻은 통증이라서 후회는 없다. 잠잘 때 뒤척이다 자꾸 잠이 깨서 탈이지만.....
그렇게 낯선 장소, 머나먼 타향에서 밤은 깊어 간다.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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