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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Focus] 2024 더 메종, ‘디자인살롱 서울 2024’ 컨퍼런스 (2)volume.48 2024. 7. 2. 18:03
2.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융합과 균형의 건축’
_ITM유이화건축사사무소의 유이화 대표
유이화 대표는 이번 세미나에서 스승이자 아버지이기도 한 이타미 준의 철학과 그가 남긴 건축물을 소개하며, 어떻게 건축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융합하며 균형을 이루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먼저 아버지가 어떻게 이타미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됐는지 말씀드리고자 한다. 이타미준 이름은 예명이다. 한국 이름은 유동룡(庾東龍)으로, 귀화를 안 하셨는데, 유(庾)가 일본에는 없는 활자였다. 당시 일본에서 태어나서 대학교까지 다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이름으로는 건축가로서 잡지에 작품 발표조차 내기 힘들었다. 그래서 예명을 만들었다. ‘이타미’는 오사카에 있는 이타미 공항에서 딴 성이다. 사실 재일교포의 삶은 정말 녹록지 않다. 온갖 핍박과 차별 속에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에 긍지를 갖고 살아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엄한 교육 때문에, 아버지는 귀화하지 않고 한국 국적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러다 한국 분이신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내가 좀 알아야 되겠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때 당시 오사카에 있는 이타미 공항을 통해서 처음 고국을 방문하셨다. 그러면서 ‘나는 국제인으로 살겠다’고 선언하시며, 그 의미로 이타미 공항의 이름을 따서 ‘이타미’로 짓게 된 것이다. ‘준’은 당시 유명한 작곡가 길옥윤을 아실 것이다. 그분은 요시아준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활동하셨다. 당시 패티 김 선생님과 결혼하셔서 활동하실 때, 아버지와는 의형제 사이였다. 어느 날 길옥윤 선생님과 클럽에서 술을 마시다가 “나도 준 이니까 너도 준 해라”라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이타미준’이라는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당시 신건축의 데뷔 작품을 ‘이타미준’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셨다. 아버지는 30대 초중반에 만든 그 예명을 돌아가실 때까지 작가명으로 쓰신 것이다.
온양민속박물관
온양민속박물관는 이타미준이라는 이름을 한국에서 제일 처음 알리게 된 작품이다. 10년 전쯤에 내가 직접 보존 차원으로 리노메이션을 해서 재개관했다. 현재 구정아트센터라는 이름으로 개관해서 많은 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온양민속박물관을 만들고 발표를 했을 때, 한국 건축계가 난리 났다. ‘한국적인 것 같기도 하고, 왜색이 짙은 것 같기도 한 이 건축물은 무엇인가?’라며 당시에 논란이 일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건축을 의식하고 만든 게 아니라 이곳이 아산 근처의 온양으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에서부터 모티브를 가져왔는데, 어디서 갑자기 왜색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라며 평생을 억울해하셨다. <이타미 준의 바다>라는 다큐멘터리에도 그 얘기가 나오는데, 오히려 일본 건축가들이 출연해서 “이건 절대 일본 스타일이 아니다. 왜 일본 색이 짙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 작품은 당최 일본 색하고는 거리가 멀다”라고 인터뷰하는 장면도 나온다.
당시 온양민속박물관이 완성될 때가 82년도인데, 우리 아버지는 35년생으로, 30대 중후반에 만든 것이다. 지금의 내 나이는 만으로 50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것에 반하는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직접 말로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는 정말 천재’라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 와서 보면 볼수록 더 그렇게 느껴지고 있다. 온양민속박물관은 당시 굉장히 저 예산인 프로젝트였다. 그만큼 예산은 없었지만, 아버지는 “나를 알릴 수 있는 첫 번째 작품이라 진짜 잘하고 싶다”라며 고민했던 흔적이 보인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셨다. 이 지역 땅에서 나오는 흙을 팠는데, 그때 당시는 벽돌을 프레스 기계로 하나하나 찍어내야만 했다. 그렇게 찍어낸 후 초벌 상태의 벽돌을 하나씩 쌓아 올린 것이다. 그래서 온양민속박물관은, 이 땅에서 나오는 흙을 현장 소장님과 상주하시면서 한 장 한 장 구워냈다. 현재 구정아트센터의 한켠에 그 프레스 기계가 전시되어 있다. 언젠가 가서 보실 일이 있으시면 ‘아. 이타미준이 실제 벽돌을 찍었던 프레스 기계구나’라는 것을 아실 것이다. 건물의 모습은 거북선이다. 그래서 선박을 연상시키기 위해 목재를 트러스 구조로 해서 지붕을 만들었다. 당시 이타미준이 스케치를 그렸는데, 바람이 휘날리는 게 느껴진다.
특히 30대 중반에 본인만의 철학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굉장히 쉽지 않은 부분이다. 저 또한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30대 중후반에 본인의 철학을 이미 세팅하고, 이 지역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셨다.
“지역의 문화성과 역사성을 배경으로 하여 컨텍스트를 현재로 끌어내지 않고서는 현대의 사실성을 획득할 수 없다. 시간적인 두께가 없는 현재란, 시제에만 머물 뿐 정착하기 어렵다.”
나는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요즘에 와서야 깨달은 지 얼마 안 된다. 현재 구정아트센터에는 2~30대의 젊은이들이 가서 핫플이라며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린다. 그만큼 인기 있는 장소로 통한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 그 이야기가 이런 말이었구나’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말은 “어떤 건축물이 그 지역의 문화, 역사성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고자 건축했을 때, 비로소 현재의 사실성을 획득할 수 있구나. 그렇기 때문에 70~80년대에 지어진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2~30대들이 가서 열광하고 공감할 수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나 요즘, 이타미준이 설계한 포도 호텔에 가서도 젊은 친구들이 핫플 장소로 사진을 올릴 만큼, 여전히 인기를 모으고 있다. 그만큼 온양민속박물관은 4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낡고 추한 모습이 아니라 현재성을 지니면서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들한테 공감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는 “건축이라는 것은, 지역의 역사성과 문화성, 그 컨텍스트를 추출해서 건축에 삽입시켜야지만 생명력을 지닐 수 있다”라고 해석했다.
아버지는 주로 건축을 발표하실 때, 본인의 생각을 최대한 글로 써서 발표하셨다. 그때 당시에 일본의 시대 상황을 이해한다면, ‘30대의 나이에 시대적인 조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면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세팅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될 것이다. 당시 일본은 60년대 올림픽 이후 7~80년도에 버블 경제 시대였다. 정말 화려한 고층 건물들이 하루아침에 하나둘씩 생겨나고, 금세 거리가 화려하게 바뀌어 갔다. 그만큼 엄청난 속도로 환골탈태를 하는 시대였다. 특히 대리석이라든지, 유리 커튼월로 만든 건축물들로 가득한 데, 지금 동경의 화려한 모습들은 7~80년도에 이미 세팅이 된 것이다. 물론 2023년 올림픽을 기점으로 부분부분 재생이나 재건축이 되면서 또 화려하게 변모하고 있지만, 그때 당시의 모든 건축가는 그 현대 건축의 흐름에 본인을 태워서 화려한 건축물을 만들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타미 준은 “현대 건축은 잘못 가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본인의 건축을 통해서 꾸준히 말해왔다.
각인의 탑
80년대 후반에는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에 본인의 아뜰리에를 만들었다. 당시 100평의 대지를 사서 아뜰리에를 지었는데, 조금 자랑하자면 내가 여기서 학교에 다녔다. 어느 날 이 집에서 나와 학교에 가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사람이 살았느냐고.”(웃음) 그만큼 굉장히 원초적인 형태의 피라미드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 아버지는 “소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온기와 야성미에 주목해야 된다”라고 이야기하셨다.
그래서 화려하게 가공된 소재뿐만 아니라, 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야성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집에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고민하셨다. 이후 석재상을 찾아가셨다. 근처 석재상 한쪽 구석에 반듯하게 자르고 남은 버려진 자투리 부분들을 본 것이다. 당시 우리 아버지는 그것을 보고 거의 유레카를 외치시면서 “이거다! 나 이 돌을 사겠어”라고 말했더니, 석재장 사장님께서 “그냥 가져가”라고 하시고는 직접 가져다주셨다. 그만큼 석재장 사장님 입장에서는 돈 안 들고 쓰레기를 버린 것이고, 우리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소위 득템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같은 소재라도 누군가의 눈에는 쓰레기이고, 누군가의 눈에는 보물인 것이다. 아버지는 이 돌이 갖고 있는 그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형태는 어떻게 해야 될까?’를 고민하던 중, 가장 원초적인 피라미드 모양으로 만들고 소재를 조금 더 주목받도록 결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런 모양이 됐고, 그 위에 생긴 핸들 모양은 돌이 아니고 금속 소재를 사용했다. 이것은 ‘핸들을 이용해 땅에서부터 기운을 하늘로 끌어 올린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건물은 철거가 된 상태다. 현재 이 땅에는 그대로 내가 2층짜리 아주 모던한 형태의 건물을 지어서 회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핸들 모양의 조각과 여기에 덮어졌던 돌들은 그대로 정원에 들어가는 초입 부분에 깔아서 흔적을 남겨놨다.
아버지 이타미준은 본인의 작품 안에 항상 조각이 있었다. 그러니까 자기 작품에 다른 사람의 작업이 들어오는 걸 허용하지 않으셨다. 본인이 전방위 예술가이기도 하셨기 때문에, 도면에 실제로 그렇게 그려져 있다. 독특한 점은 천장에 무언가가 설치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집마다 물탱크를 연결해야 하는데 연결할 데가 없었다. 그래서 이타미준은 천장 가까운 곳에 물탱크를 설치했다. 그리고 앞에 번쩍거리는 금속판넬을 두고, 위에는 천창을 두었다. 그래서 내가 아직도 이 아름다운 공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문을 한 번 여닫을 때마다 공기의 미세한 진동이 천장에 흔들렸다. 그러면 햇빛을 받아서 이 금빛 물결이 천장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현대 건축에서 조형의 순수성을 획득하려면 작가는 그 토지나 전통의 뿌리를 두고 문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추출해야만 하며, 강인한 염원을 담은 조형 감각과 자유로운 시대정신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각인의 탑을 만들면서 이야기하셨다.
석채의 교회
이후 1991년 석채의 교회를 통해서 비로소 이타미준이라는 이름을 일본 건축계에 알린다. 이타미준은 이 건축물을 통해서 굉장히 유명해졌다. 이 건물은 홋카이도(북해도)에 위치해 있다. 홋카이도는 겨울에 눈이 한 번 오면 사람 키 이상으로 온다. 그래서 홋카이도의 전통 건축물들은 다 지붕의 경사가 굉장히 가파르다. 눈이 그대로 흘러 내려가야만, 집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지붕의 형태를 갖고 있고, 주변은 10m 이상의 침엽수림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아버지는 ‘엄청난 설국이 됐을 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건축의 형태여야 된다’라고 생각하셨다. 그리고 고민 끝에 그 지역에서 나온 돌을 쌓았다. 내부는 그 지역에서 나오는 실버 파인을 잘라서 트러스 구조로 만들었다. 여기서 아버지는 ‘예의 건축’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건축에도 예의를 차려야 된다는 말이다. 홋카이도의 니돔 리조트라는 골프 리조트 안에는 석채의 교회와 나무의 교회가 있다. 그래서 하나는 돌, 하나는 나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M빌딩
이타미준이 92년도에 만든 M빌딩은 근생 건물이다. 이 건물은 현재 화려한 동경의 아카사카 거리에 우뚝 서 있다. 나는 사실 건축가가 대단하지만, 건축주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건축주가 있어야 훌륭한 건축가가 나오는 법’이다. 일본도 1, 2층이 가장 세를 많이 받기에 좋은 공간이다. 아버지는 이 화려한 거리에 ‘돌을 쌓아서 돌기둥처럼 만들자’는 컨셉을 제안했는데, 건축주는 이를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다. 정말 건축주가 대단하다고 본다. 아버지는 또 여기서 “근대 건축, 합리주의와 기능 제일의 발상에 사로잡혀 멋도 없고 무표정하게 인간의 접근을 막는 현대 건축, 오늘날 우리의 건축은 이런 건축물의 물량 공세에 밀려 마치 무거운 짐을 짊어진 노인처럼 보인다. 표현할 시대정신마저 잃은 현재, 현대 건축을 구성하는 건축언어조차 애매하고 뒤죽박죽인 지금의 상황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가. 표현할 주제의 상실이자 사랑으로 자라나는 부드러움의 상실이 아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게 비단 일본에 있는 현대 건축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서울의 풍경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어떤 건축물들을 보면, 정말 무거운 짐을 짊어진 추한 노인을 보는 것 같다. 이때 또 이런 말씀을 남겼다. “일본 현대 건축의 본질적인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체온과 건축의 야성미다.” 이는 한국의 현대 건축에도 다 적용되는 말이다. 어느 틈엔가 야성미가 느껴지는 건축은 사라지고, 화려한 작품만 화제에 오르고 있다. 이것이 90년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이타미준이 이야기한 부분이다.
포도호텔
2001년도에 개관한 포도호텔은 핀크스라는 골프장 클럽 하우스의 멤버스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 지어졌다. 객실 수는 27개뿐이다. 지붕은 티타늄 성분이 있는 징크로 마감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 징크 소재를 우리나라에 쓴, 첫 번째 사례일 것이다.
제주도에는 낮은 오름들이 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오름들을 연결해 놓은 듯한, 그리고 제주 전통의 낮은 초가지붕을 연결해 놓은 듯한, 제주의 전통 건축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이 포도호텔이다. 아버지는 “국제적이며 보편적인 세계에서 독창성이란, 그리고 오리지널리티란,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에서 생산된 사상이 아니면 큰 의미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이 포도호텔이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 의미가 있을까?’, ‘홋카이도에 있으면 의미가 있을까?’, 그만큼 제주도이기에 그만의 오리지널리티를 품으면서, 23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제 개관한 호텔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세월의 때는 입었지만, 요즘 지어진 건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매일 몇십 명씩, 혹은 몇백 명씩 숙박비가 비싸서 묶지는 못하더라도, 밖에서 사진을 찍던지, 우동 한 그릇이라도 먹고 가는 것이다. 이것이 건축의 힘이다.
건축이 잘 유지만 된다면, 실로 제주 지역의 오리지널리티를 품고 있는 건물이기에, 나는 50년이 지나도 그때의 젊은 사람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건물로서 존재할 것으로 생각한다. 평면 역시, 마치 포도 알맹이 하나하나가 자연 발생적으로 맺힌 것처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 평면은 컴퓨터에서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평면이다. 내부의 중정에는 빛과 바람이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중간에는 틈새 창이 있다. 그래서 복도에서도 내외부가 계속 소통하고 있다.
수풍석 뮤지엄
이타미준은 수풍석 뮤지엄을 통해서 2010년에 비로소 일본이 인정한 일본 최고의 건축상인 무라노 도고상을 받았다. 물론 그전에도 2005년 프랑스 예술훈장 슈발리에와 레지옹 도뇌르 훈장, 2006년 한국의 김수근 건축상, 200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이미 수상하셨다.
“훌륭한 건축가는 누가 있다? 바로 훌륭한 건축주가 있다.” 건축주는 당시 “내가 이 타운 하우스 단지에 부가가치를 올리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미술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미술관을 운영하려면, 작가 선정도 해야 하고, 큐레이터도 뽑아야 하며, 전시 교육도 신경 써야 할 듯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의견을 물었다. 나 역시 운 좋게 그 옆에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파빌리온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을 컬렉션하는 미술관을 만들면 됩니다. 특히 제주를 대표하는 자연인 물, 바람, 돌, 이 세 개를 컬렉션하는 미술관을 만듭시다”라고 이야기하신 것이다. 일반적인 건축주분들은 “뭐야?”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멋진 건축주는 그 자리에서 “내가 20억이라는 돈을 선생님께 드릴 테니까 그 컨셉을 구현해 주세요”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 3개의 뮤지엄을 만들게 된 것이다.
수(水) 뮤지엄은 하늘에서 봤을 때 물을 프레이밍, 액자화한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봤을 때 액자처럼 물을 컬렉션 한 모습이다. 안에 들어갔을 때 이 타원형은 제주의 하늘을 의미한다. 제주도는 타원형으로 생겼다. 제주 하늘 모양의 타원을 뚫어놓고 물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게 했다. 여기에 용 모양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용은 아버지 한국 성함이 ‘동룡’, 동쪽의 용이라서 용머리를 낙관처럼 사용하셨다. 제주도에 있는 유동룡 미술관에 가보면 이 용이 또 있다.
풍(風) 뮤지엄은 바람을 컬렉션한 것이다. 이것을 지었을 때 민원이 많이 들어왔는데, “왜 내 집 앞에 창고를 짓느냐”라고 따진 것이다. 실제로 창고 모양처럼 생겼다. 그런데 겉에서 보면 바람이 지나가면서 조각하고 나가는 형태다. 그래서 나무와 나무 사이에 약 9m~11m의 틈이 있는데 이 사이로 바람이 분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 여기에 들어가면 “쒸이”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바람을 컬렉션 한 것이다. 내부를 다크하게 칠해 놓은 이유는 미술관은 대부분 낮에 오픈한다. 그래서 동공이 채 열리기 전에 들어가면 순간 멈칫하게 되는데, 안 보이기 때문이다. 동공이 열릴 때까지는 살금살금 걷게 된다. 이는 ‘잠시 시각을 닫고 오로지 그 바람의 청각과 촉각에만 주목해 봐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건물 자체가 악기 통이다.
석(石) 뮤지엄은 돌을 컬렉션한 것이다. 안에는 다 구로 철판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의 작은 조각이 있다. 천창을 통해서 빛이 들어오는데, 우리는 이것을 ‘빚의 꽃’이라고 부른다. 이 ‘빛의 꽃’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서 빛이 맺히고 계속 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빛이 조각을 비춘다. 물론 의도한 것이다. 그만큼 지척에 널려있는 돌을 마치 본인의 컬렉션처럼 갖다 놓았는데, 뒤쪽에는 삼방산이 보인다. 마치 손 위에 삼방산을 올려놓는 듯한 이미지다.
방주교회
방주교회는 늘 많은 사람들의 관광 투어 코스 중 하나로 손꼽힌다. 클라이언트가 방주교회라고 네이밍을 한 것이고, 원래 우리 프로젝트 이름은 ‘하늘 교회’였다. 그래서 ‘이 변화무쌍한 하늘 구름의 흐름을, 어떻게 하면 지붕에 반영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끝에, 이 같은 형태로 만든 것이다. 노아의 방주로부터 그 모티브를 가져온 것은 맞다. 그래서 배를 형상화했고, 지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모티브로 쓴 게 물고기다. 마치 반짝거리는 물고기 비닐을 표현하기 위해 세 가지 징크 소재를 사용했다. 그리고 물고기 머리가 입을 벌리고 물에서부터 튀어 올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표현했다. 그래서 천창을 통해서 빛이 들어온다.
건축주와 단 한 가지 대립했던 부분이, 건축주는 십자가를 지붕 위에 올려달라라고 계속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하시다가 결국 구조만 노출하는 정도에서 타협을 보신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십자가의 프로포션은 아니지만, 처음에 십자가가 작았다가 이것만큼은 키워달라고 하셔서 두 배로 키워 드렸다. 그리고 앉아 있으면 그림자로 십자가가 인지되게끔 연출했다.
유동룡 미술관
이타미준은 마지막으로 서원 힐스 아트리움 클럽하우스를 유작으로 남기셨다.
아버지는 생전에 계실 때 “내가 유언장을 써놨다. 서랍을 열면 있다”라고 가끔 이야기하셔서, 그런 이야기 좀 하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돌아가시고 난 뒤 동생과 함께 서랍을 열어봤더니 돈이 어디 있다는 이야기는 없고(웃음), ‘이타미준 건축문화재단을 만들어라. 이 모든 책임은 내 딸 유이화한테 있다’라는 말만 남기신 것이다. 돈을 좀 같이 남기셨으면 내가 덜 고생할 텐데(웃음), 어찌 됐건 이타미준 건축문화재단을 2019년도에 설립하게 됐다.
당시 땅을 보러 갔는데, 백마가 꼬리를 흔들면서 저를 보고 있어서 ‘아 여기다’라고 생각했다. 마치 우리 아버지가 “이곳이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것 같아서, 문화 도유지로 묶여 있는 제주도 땅을 샀다. 기부 없이, 100% 사비로 미술관을 지었다. 이 미술관을 꼭 방문해 주셨으면 한다. 이곳은 아버지 이타미준의 철학을 의식하면서 만든 박물관으로, 유동룡 미술관이라고 아버지의 한국 이름을 붙였다. 그렇지만 유동룡이라고 하면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타미준이라는 이름을 같이 쓴다. 이 건물로 ‘2023년 한국건축가협회 건축상’을 수상했다.
굳이 박물관이라고 하지 않고 미술관이라고 지은 이유는 ‘아버지의 철학과 결을 같이 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정신을 같이 해야지만, 아버지의 철학이 계속 이어지면서 올림을 일으킬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서다. 이곳은 현재 건축, 미술, 공예 등 모든 분야의 작품을 계속 선보이고 있다. 특히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지금 현대 건축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온기와 야성미다”라는 말을 2회 전시의 주제 센텐스로 정했다.
나는 이타미준 건축연구소 서울지사로 2001년도에 오픈해서 최근에 ITM유이화건축사사무소로 이름을 바꿨다. 그래서 나 역시 계속 아버지의 건축 철학을 기반으로, 그 정신에 뿌리를 두고, 지금의 시대정신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한동대학교 채플내가 23년도에 만든 한동대학교 채플이다. 하늘에서 봤을 때 십자가 형태다. 언덕 위에 십자가 모양을 지은 것으로, 아래에서 십자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문은 학생들이 여러 명 오더라도 ‘한 사람씩 들어가라’는 의미로 문을 좁게 만들었다.
시호재
이곳은 처음에 클라이언트가 본인의 프라이빗 갤러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셔서 만들게 되었는데, 바로 옆에 카페와 집도 같이 하게 됐다. 만들고 난 후 멀어서 누가 올까 싶었는데 3~4천 원의 저렴한 커피 가격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1억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래서 한 달에 4~500명씩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내가 간다고 하면 클라이언트가 저 멀리에서부터 뛰어나와 주신다(웃음). 처음 건물을 짓기 전, 알록달록한 슬레이트 지붕이 양옥인지, 한옥인지 정체불명의 모습이어서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하던 차에, 앞의 팔공산 산새가 굉장히 파워풀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저 원경은 내가 가지고 오고, 근경은 내가 차단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넓은 벽을 만들고 그 안의 세상을 만든 것이다. 또한 나는 근경에 마치 예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조경을 만들어 달라고 조경전문가 김봉찬 대표님께 부탁했다. 이는 원경의 팔공산 자랑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건축이라는 것 자체가 그냥 자연의 조연 역할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팔공산 자락에 추임새로서의 지붕 쉐입만 가지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시호재 건축물을 완성 지었다.
그만큼 나에게 건축이란, 현재성을 지니기 위해서란, 오리지널리티를 갖기 위해서란, ‘건축이 어떤 태도와 어떤 자세로 자연을 맞이해 그 땅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여러 작품을 소개하게 됐다.』
글, 취재. 박하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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